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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하얀 하늘의 장 (2)
왕이 방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목 아래로 축축한 피가 묻어 있었다. 왕은 한 걸음씩 떼어낼 때마다 기침을 했다. 또 함께 피를 토해냈다. 류거흘이 태도를 바닥에서 빼내려 했지만 가율이 손으로 태도의 날을 잡았다. 류거흘은 가율에게 신경질적인 눈빛을 보냈지만 가율은 태도의 날을 피로 물들이며 태도를 놓지 않는다. 가율은 말을 이어갔다.
“왕은 어차피 죽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1년 정도겠지요.”
류거흘은 으르렁 대며 말을 끊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들의 손으로 왕을……!”
하지만 가율이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은 죽습니다. 왕도 마찬가지고 아버지도 마찬가지며 저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변합니다. 지금 저의 생각이 아버지와 다른 것처럼, 또 저의 아들은 저와 생각이 다르겠지요. 그러나 제 아들이 아버지와 생각이 같을 리는 없습니다. 어딘가는 다르고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변해갑니다.”
류거흘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율에게 묻는다.
“…네 자신의 생각은 무엇이냐?”
“우리는 더 이상 전쟁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햔이 슬그머니 말문을 텄다. 목소리는 낮게 깔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려린과 지진은 계단을 완전히 내려와 햔의 뒤에 선다. 류거흘은 고개를 조금 돌려 햔에게 눈빛을 줬다. 햔은 눈 깜짝 한 번 하지 않았다. 주먹을 굳게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문다. 류거흘은 뒤를 돌아섰다. 태도에서 손을 놓은 채로 햔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지진이 나서려는 것을 려린이 붙잡아 말렸다. 류거흘은 햔의 코앞까지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비웃음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결국 네 손으로 피를 보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그런…….”
“류거흘, 자네의 아내는 좋은 곳으로 갔기를 비네.”
햔이 단호히 한 마디 했다. 그러자 류거흘은 멱살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돌덩이같은 주먹으로 순식간에 햔의 턱을 강타했다. 지진이 넘어지는 햔을 간신히 붙잡았다. 햔은 지진에게 부축을 받아 일어나면서 다시 한 마디 하려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일을 그르치는 것에…….”
류거흘은 햔의 복부를 걷어찼다. 지진과 햔은 뒤로 나가떨어져 계단에 몸을 부딪친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류거흘이 발걸음을 돌렸다. 여전히 가율 곁에 박혀있는 태도를 거칠게 뽑아 햔을 향한다. 어느새 려린이 류거흘의 앞을 가로막았다. 려린은 서둘러 활시위를 당겼다. 류거흘이 눈을 크게 뜨고 멈칫한다.
계단에 널브러진 채로 햔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복도를 마치 자신의 성대처럼 사용해서 큰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시간이 정지된 것같이 복도 안의 사람들은 모두 멈춘다. 등불도 기류에 몸을 맡겨 잠잠한 불빛을 내었다. 지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적막함을 씻는다. 복도는 이어서 말했다.
“언제까지 인육애호가 같은 무리를 만들 텐가? 꼭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무기를 휘두르는 것을 두고 인육애호가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그것으로 충족해 살아가는 부류 전부를 인육애호가라 부를 수 있다. 무기를 쥐지 않아도! 꼭 불을 지르지 않더라도!”
회의장 지하 전체가 울려 내, 목소리는 지상까지 오른다. 시체 사이에서 살아남은 군들은 숨을 몰아쉬며 귀를 세웠다. 그들은 상처 입은 몸으로 시체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가 그들에게 묻은 피를 어느덧 완전히 씻어 내렸다. 피의 웅덩이도 비가 고여 점점 옅어진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 목소리도 크게 증폭되었다. 이번에는 가율의 목소리였다.
“오로지 왕의 암살을 위해, 황룡왕궁에 들어 왕의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를 죽인 군을 이해하게 된 것도, 왕을 이해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나라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우리는 대권족이 멋대로 붙인 인육애호가라는 이름에 정말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가율은 이제 단정 짓듯 한다.
“오늘 이전에 제가 왕을 암살했거나 여기서 왕을 베어버리면 나라는 혼란해집니다. 우리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진짜 인육애호가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의 흔적은 우리 대에서 끊어야 합니다.”
가율은 어느덧 자세를 고쳐 일어났다. 단검을 주워 세게 쥐었다. 흔들리는 목소리가 단검을 대신하여 류거흘의 심장을 꿰뚫는다.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나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계속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전쟁 속에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류거흘은 완전히 뒤를 돌아 가율을 마주보고 있다. 태도는 축 늘어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잠시 아무런 소리도 없어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만 들렸다. 류거흘이 갑작스레 한 걸음을 떼어 모든 이들을 긴장시켰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가율의 목전까지 다가가 멈춰 섰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주먹모양으로 태도를 고쳐 쥔 뒤, 가로로 휘둘렀다. 가율은 황급히 단검으로 막으며 후퇴했다. 단검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벽에 쳐 박혀 버렸다. 이어서 류거흘이 휘두른 주먹에 가율도 벽에 부딪혔다. 다시 휘두른 태도가 가율의 목옆에 박힌다. 류거흘은 가율을 내려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여기서부터는 말이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활을 꼭 쥔 려린과 눈을 마주한다. 그녀에게도 그는 한 마디 했다.
“만약 활을 쏜다면 조심하길 바란다. 내가 피하기라도 하면 곧바로 왕이 맞는다.”
려린은 흠칫 놀라 활을 기울어뜨렸다. 확실히 류거흘이 피하면 화살촉은 곧장 왕을 찌를 것이 분명했다. 류거흘은 입 꼬리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왕과 눈을 마주쳤다. 왕은 피를 토해내지도 몸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류거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왕이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류거흘이 작게 웃었다. 왕은 말하려던 것을 멈추었다. 둘은 한참이나 눈빛만 주고받는다. 결국 첫 운을 띄운 것은 류거흘이다.
“왕……이시여.”
흔들리는 불빛이 어렴풋이 류거흘의 얼굴 전체를 비췄다. 바깥 하늘처럼 눈으로부터 턱까지 비를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도 보슬비도 아닌 것이 잔잔하게, 적당히 땅을 굳힐 정도로만 천천히 내렸다. 살짝 젖은 입술이 다시 움직인다.
“돌아갈 길 같은 것은 두지 않았습니다.”
류거흘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햔은 혼자 힘으로 겨우 서서 신음소리와 함께 말을 뱉는다. 아직도, 라며 류거흘을 향해 책망하듯 했다. 그러자 류거흘은, 이해했다, 고 딱 잘라 말했다. 울림 있는 목소리로 류거흘이 이어 얘기한다.
“사람은 사람을 만들고, 인육애호가는 인육애호가를 만들어낸다.”
류거흘이 자신의 심장을 쥘 것처럼 가슴을 부여잡았다. 피를 토해내듯 외친다.
“이대로는 내가 나를 만든다는 것, 계속해서 인육애호가가 늘어나기만 할 거라는 말 알아. 그렇지만 이 따위 것, 머리가 이해해본들 소용없어!”
왕이 류거흘의 심장을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네.”
비 내리는 소리가 차츰 약해져간다. 일렁이던 등불도 안정되어 사람들의 그림자는 이제 날뛰지 않았다. 등불은 따스함을 바라고 지워져가는 빗소리는 고요를 일깨운다. 따스함과 고요함은 서로의 손을 깍지 꼈다.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손에 힘을 주고, 너무 가까이 붙지 않도록 팔로 버텼다. 둘의 사이에 작은 공간으로 자그마한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구름같이 부드럽고 물방울 같이 투명했으며 눈빛같이 영롱했다. 왕의 목소리는 편안하다.

도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