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셋. 푸른 물결의 장 (3)



  “류거흘 대장은 부인을 잃었습니다.”

  권족 회의장의 지하에서 가율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가율은 계단의 첫 단에 서서 곁눈질로 위쪽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가 있다. 복도에는 양 옆으로 약 스무 개의 방이 존재한다. 벽에 황금색 잔으로 만들어진 기름을 이용한 등이 복도를 항시 밝힌다. 본래 등은 회의장에서 항상 두 명의 선택된 군에 의해 관리된다. 그러나 지금 두 군은 가율에 의해서 심장이 멈춘 지 오래였다. 복도의 첫 번째 방에서 왕이 기침한다. 가율은 계단을 내려와 왕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왕은 넓게 펴진 동물의 가죽위에 앉아 있다. 방의 네 모서리에서 일렁이는 불이 왕의 얼굴을 그림자로 난자했다. 검은 눈썹 아래로 깊은 눈동자에 눈 밑에는 기미가 껴있었다. 소맷자락으로 몇 번 얼굴을 쓸어내린다. 가율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철왕 시대 말이었습니다. 전쟁 상대국이었던 비진이 아닌 나라의 군에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

  일렁이는 불빛에 맞춰 왕의 몸이 꿈틀거린다. 이어서 온몸을 들썩이는 기침을 두어 번 크게 뱉는다. 허리를 숙인 왕의 얼굴에는 불빛이 닿지 않았다. 오직 그림자만이 얼굴을 지배하고 있어서 눈의 옅은 흰자위만 보인다. 가율이 손을 뻗으며 한 걸음 다가오려고 하자 왕은 급히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그리고 손을 내젓는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비진 국가의 군을 막아내는 철왕을 옹호했고 대장도 본래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철왕의 군에 의해 부인이 강간, 살해당한 것을 알게 된 뒤로…….”

  왕은 세 번째 기침으로 허리는 굽히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입을 막은 소매에 피가 묻어 나왔다. 새빨개진 입술을 떨며 왕이 뒷말을 잇도록 시킨다. 방은 가율의 목소리가 가득 메우고 밤은 류거흘의 이야기로 차오른다.
  류거흘은 그 뒤로 정처 없이 떠돌며 철왕 시대의 살인귀가 되었다. 당시에는 그저 비진 국가에서 파견된 암살 부대로 보고되어 나라의 국군들은 특별히 류거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류거흘을 대신하여 실제 비진의 암살 부대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와 비진의 두 왕이 전장의 한복판에서 만났다. 철왕은 여유로웠으며 비진의 왕은 굳은 얼굴을 하였다.

  “나라의 왕이여,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후회하고 모두에게 평화로운 시대를 줍시다.”

  전쟁의 끝을 알리는 비진 왕의 한 마디는 빛보다 빠르게 모든 이의 무기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류거흘의 태도는 이후에도 전혀 무뎌짐이 없이, 오히려 반군 세력을 조직했다. 마땅한 호칭도 없었던 반군 세력은 이후 어느 대권족의 명명으로 인육애호가 집단이 되었다.
  가율은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계단 위쪽의 상황을 살폈다. 귀를 계단에 바짝 붙이고 고요함에 몸을 묻었다.
  한참동안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며 가율은 입을 연다.

  “왕이여, 아마도 당신은 혈왕(血王)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가율은 복도를 밝히는 불들을 모두 꺼버렸다. 삽시간에 어둠이 복도를 지배한다. 어둠은 차갑고 부드러운 늪처럼 복도를 채워 느릿느릿 움직이는 가율을 헤엄치듯 보이게 만들었다. 계단 위쪽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빛이 가율이 품속에서 막 꺼낸 단검을 번뜩이게 만들었다. 복도 안에서 그것은 유일한 별처럼 빛났다.

  천막을 열고 나오는 햔의 발치에 돌이 있다. 그는 가볍게 돌을 차서 숲속으로 굴려 보냈다. 돌이 이리저리 튀기는 소리가 숲을 울리고 메아리가 가실 때쯤 이어서 지진과 인열이 천막을 나온다. 지진과 인열의 손에는 각각 밧줄의 양 끝이 쥐어져있다. 밧줄 중심에는 지늘윤과 그의 군이 포박되어 있었다. 그는 햔에게 이제 어딜 가느냐고 묻는다.

  “당신이 인육애호가라고 칭한 자들이 권족 회의장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이 사태를 막아야겠죠.”

  지늘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리고 머리를 푹 숙였다 든다. 햔도 마주 고개를 숙이고 발길을 돌렸다. 인열과 지진은 밧줄을 놓고 검을 흔들어 푸른 달빛을 난반사 시켰다. 숲속으로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검의 잔상은 숲속을 휘저었다. 그러자 숲의 이곳저곳에서 비슷한 형상의 무리들이 그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명령만으로 일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지. 류거흘은 그렇게 말했네.”

  햔은 숲을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잔가지들을 치우며 걷는 지진과 인열의 주변으로 어느새 수십의 호위군이 함께 걷고 있다. 햔을 중심으로 그들은 진을 치고 한 발자국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려는 것처럼 햔은 찬찬히 눈을 움직인다. 작아진 목소리가 그들을 울린다.

  “자신은 대장이지만 그것뿐이라고 했어. 자기 한 명을 막아봐야 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움직일 거랬지.”

  숲에 진 그림자 곳곳에서 호위군들이 나타나 햔에게 합류한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도 않고 빨라지지도 않는다. 햔의 목소리만이 급하게 타박이며 그들의 발걸음을 대신했다.

  “그들은 누구로도 대표될 수 없다고 했네. 그러니…… 왕을 죽이려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라 했다.”

  햔은 고개를 들고 권족 회의장을 바라본다. 둥그런 달은 그 위에 떠있었다. 세상의 모든 눈이 뭉친 단 하나의 덩어리처럼 그것은 하얗다. 푸른 한기를 뿌리며 언제라도 떨어질듯이 하늘에 박혀있다.

  “하지만 놔둘 수는 없어.”

  호위군 무리보다 조금 더 위쪽, 권족 회의장에 가까운 곳에서 류거흘은 한 사내와 마주하고 있다. 사내는 이를 갈았다. 들고 있는 창을 땅 깊숙이 박아 넣었다. 품에서 한 장의 두루마리를 꺼내 류거흘에게 전한다. 류거흘은 그것을 펴들고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환하게 빛나는 권족 회의장과 그 주변에 가위 표시가 몇 개 되어있다. 적군이란 글씨가 붉은색으로 몇몇의 표시 위에 쓰여 있었다.
  두루마리는 류거흘에 의해 불에 타 사라진다. 사내와 류거흘은 걸음을 옮겼다. 둘은 주먹을 움켜쥐고 빈 입을 꽉 다문다. 그리고 찬바람에 가슴을 폈다. 그들이 밟아 부서지는 낙엽 소리가 나무들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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